여운형의 측근이었던 이동화는 그가 좌우합작운동에 나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당시 정세 아래서는 미군정과 대립하여서는 아무일도 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하였을 뿐 아니라 어떠한 방법이든 간에 첨예화한 좌우익의 대립을 완화시켜 정치적 안정을 이룩해야 할 간절한 필요를 느끼고 있던
합작운동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1946년 5월부터 1947년초까지의 시기를 통하여 좌우합작의 주역이었던 미군정과 중도파의 입장을 중심으로 그들이 어떠한 구상을 하였으며 이러한 구상이 좌우합작위원회를 통해 어떻게 실행되었는지, 또한 중도좌파의 핵심인물인 여운형과 그의 지지기반이었던 좌익진
좌우의 정치세력을 규합하는 일이었는데, 중추적 역할을 한 여운형과 김규식은 오래전부터 막역한 동지들이었다. 김규식은 우익으로 여운형은 좌익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양자의 사상 체계나 앞으로 구축하여야 할 정치,경제 체계에 대해서는 별 차이를 찾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흡사했다.
좌우합작
좌우합작의 움직임
이승만의 남한만의 정부수립을 주장하는 정읍발언으로 인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가능성이 커짐, 이를 막기 위해 중도파인 김규식, 여운형 등이 좌우합작위원회 결성
좌익과 우익의 중도세력이 결성한 좌우합장위원회의 좌우합작 7원칙의 발표, 그러나 좌익과 우익의 핵심정
좌우합작만이 통일 민족국가를 가능케 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일제시기 해방 후에 여운형과 같은 민족의식, 정치 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지도자들이 김규식,백남운,안재홍,김병로 등 적지 않았지만 여운형처럼 적극적으로 나서서 미국과 소련, 좌익과 우익, 남과 북을 포용하려고 노력한 지도자는 없
우익계열들은 조선인민공화국을 공산주의 단체로 규정하고 인정 하지 않음
→미군정도 조선인민공화국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음
하지만 북한 지역에 진출한 소련군은 인민위원회를 인정하고, 행정권까지 넘겨줌
→소련군과 인민위원회는 함께 정치를 하면서, 공산주의 정권 수립에 착수함
→조
1. 협동전선 성립기의 건국론
-식민지 시대의 사회주의 운동도 항일운동, 독립운동, 민족국가수립운동이었으며 때에 따라서 우익 민족주의 운동과 노선을 같이함
-신민회 회원 이동휘가 ‘한인사회당’을 조직하고, ‘사회주의적 국가를 조직 한다’라고 표방. (사회주의적 정책을 표방) 이 시기는 아
여운형, 김규식, 안재홍등 중도파세력 - 신탁통치문제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 좌우합작운동과 미소공위 재개를 통해 남북 통일임시정부 수립 지향.
1.배경
제1차 미소공동 위원회의 결렬 , 단독 정부 수립론의 대두에서
비롯된 남북분단의 위기감
*단독 정부 수립론이란? 미군정기에 이승
여운형 등 좌파들에게 접근
→총독에게 안전한 귀국을 약속하고 치안권을 넘겨받음
→8월 16일 건국동맹을 기반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
→건국 동맹은 여운형(중도좌파) + 안재홍(중도우파)의 좌우합작 단체임
-치안권을 이행하기 위해 각 지방에 지부(치안대)를 조직 : 145개 지부 결성
-중도파 세력들은 계속되는 좌우대립에 남북분단의 위기 감지
-여운형 중심의 중도파 주도로 좌우합작위원회 수립, 위원장으로 김규식 선출 (1946.7)
좌우합작운동의 궁극적인 목표 좌우세력 등 사상을 넘어서 한반도 내에
남북한이 하나로 통합되어, 중도적 사상의 임시 통일 정부수립
-좌우세